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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체납과의 전쟁, 조세정의라는 보편적 가치

[사설] 체납과의 전쟁, 조세정의라는 보편적 가치
국세청 청사 전경 (사진제공=국세청)

국가 공동체를 유지하는 최소한의 약속은 ‘내야 할 세금은 낸다’는 기본 원칙이다. 그러나 국세청이 12일 공개한 고액·상습체납자 명단은 이 단순한 원칙조차 무너지고 있음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국세청이 발표한 1만1009명의 명단에는 수천억 원대의 세금을 내지 않은 이들까지 포함됐다. 징수 체계가 이 정도로 허술했다는 사실 자체가 국민적 허탈감을 불러일으킨다.

개인 체납액 1위는 ‘선박왕’으로 불리는 권혁 시도상선 회장이다. 종합소득세 등 4건을 더해 무려 3938억 원을 체납했다. 더 심각한 것은 그가 실질적으로 책임을 지는 것으로 알려진 법인들까지도 체납액 상위 1~3위를 모두 차지했다는 점이다. 시도탱커홀딩, 시도홀딩, 시도카캐리어서비스 등 관련 법인의 체납 총액은 수천억 원에 달한다. 개인과 법인의 책임이 동시에 무너진 것이다.

김성태 전 쌍방울그룹 회장 또한 165억 원의 세금을 내지 않아 상위 10위에 올랐다. 대기업 총수·기업가들이 납부 능력이 있음에도 세금을 외면한 채 명단에 등장했다는 사실은 우리 사회의 조세 정의가 얼마나 취약한지 여실히 드러낸다. 국세청이 “유명인은 없다”고 밝혔지만, 명단을 보면 상황은 다르다. 사회적 영향력이 큰 인물들일수록 더 높은 의무를 져야 한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더욱 우려스러운 대목은 이들 중 상당수가 고가 아파트에 거주하며 타인 명의 계좌를 통해 소득을 은닉하거나, 체납을 예상하고 부동산을 배우자 명의로 미리 넘기는 방식으로 재산을 숨긴 정황이다. 실제로 국세청이 감치(구금) 의결까지 내린 경우까지 나왔다. 납부 능력이 있음에도 의도적으로 세금을 회피한 악의적 체납자라는 뜻이다.

조세 형평은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기초를 떠받치는 핵심 원칙이다. 성실하게 세금을 낸 다수 국민은 매년 꼬박꼬박 장부를 맞추며 국가 운영에 기여한다. 그런데 일부 고액 자산가들이 법망을 피해가며 사적 이익을 지키는 데만 몰두한다면, 누가 이 체계를 신뢰하겠는가. 세금은 ‘약한 사람만 내는 돈’이라는 인식이 자리 잡는 순간 조세 시스템은 물론 공동체 자체가 무너질 수 있다.

국세청이 출국금지·강제징수·명단공개 등 기존의 제재를 강화하겠다고 밝힌 것은 다행이다. 그러나 지금 수준의 ‘사후적 제재’만으로는 체납 구조를 근본적으로 바꾸기 어렵다. 악의적 체납을 반복하는 고액 자산가에 대한 조사 강화, 은닉 재산 추적 시스템의 고도화, 배우자·특수관계인 차명 재산에 대한 엄정한 검증이 뒷받침돼야 한다.

정부는 조세정의라는 보편적 가치를 바로 세우는 데 있어 어떤 타협도 있어서는 안 된다. 세금을 성실하게 내는 시민을 보호하는 일은 공권력의 가장 기본적인 책무다. 지금의 체납 행태를 묵과한다면, 불공정은 누적되고 시민의 신뢰는 회복할 수 없을 만큼 떨어질 것이다. 고액·상습체납을 근절하는 것은 단순한 세금 문제가 아니라 대한민국의 공정성을 지키기 위한 최소한의 의무다.

top_tier_1@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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