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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일구지학의 보수, 자중지란의 야당

【사설】 일구지학의 보수, 자중지란의 야당
국민의힘의 위기는 외부와의 충돌이 아니라 내부에서 비롯된 자중지란에 가깝다

정당이 위기에 빠질 때 가장 먼저 드러나는 것은 노선의 혼란이 아니라 리더십의 빈곤이다. 최근 국민의힘을 둘러싼 일련의 갈등은 단순한 계파 충돌을 넘어 한국 보수 정치의 현재 수준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민생은 뒷전으로 밀리고 당내 권력 투쟁만 부각되는 모습은 제1야당이라기보다 내부 전쟁을 치르는 정치 집단에 가깝다는 인상을 준다.

이 상황을 설명하는 데 떠오르는 말이 있다. 일구지학(一丘之貉). “한 언덕에 사는 너구리”라는 뜻으로, 겉으로는 달라 보여도 실상은 다를 바 없는 무리를 가리킨다. 중국 『한서(漢書)』 「양운전(楊惲傳)」에 등장하는 고사로, 서로를 비판하며 선을 긋지만 결국 같은 이해관계와 정치 문법에 묶여 있는 집단을 풍자할 때 인용된다.

지금 국민이 바라보는 국민의힘의 모습은 일구지학이라는 말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당권파와 반대파가 날을 세우고 있으나 국민이 체감하는 것은 정책 경쟁이 아니라 자리 경쟁이라는 냉정한 평가가 적지 않다. 경제의 불확실성과 안보 환경의 변화, 누적된 사회 갈등이라는 중대한 과제가 산적한 상황에서 제1야당이 보여주는 모습이 대안 경쟁이 아닌 파열음이라는 점은 가볍게 넘길 일이 아니다.

최근 당내에서는 전직 대표 제명이라는 초강수 조치까지 이어지며 갈등은 이미 공개적 권력 투쟁의 단계로 접어들었다. 이러한 장면이 건강한 토론과 노선 경쟁으로 비친다면 바람직하겠지만, 권력 재편을 둘러싼 세력 경쟁으로 읽히는 순간 정당 정치에 대한 신뢰는 흔들릴 수밖에 없다.

역설적인 점은 갈등의 중심에 선 인물들이 모두 정치 경력이 일천하다는 사실이다. 새로운 정치가 등장한 듯 보이지만, 실제로는 영남권 중심의 기존 정치 질서가 여전히 작동하고 있다는 해석이 나온다. 이는 쇄신이 아니라 권력 구조의 재편에 가깝다. 정치 신인을 앞세운 채 구주류가 영향력을 행사하는 구조라면 그것은 쇄신이라기보다 재포장에 가까울 것이다.

문제의 본질은 더 깊다. 지금 국민의힘의 위기는 외부와의 충돌이 아니라 내부에서 비롯된 자중지란에 가깝다는 지적이 설득력을 얻는다. 정당은 외부와 경쟁하기 전에 내부의 방향부터 정해야 한다. 노선과 가치에 대한 합의 없이 인물 중심의 충돌만 반복된다면 전략적 사고 능력을 약화시키고 있다는 우려를 피하기 어렵다.

보수와 우파를 구분하지 못하는 태도 역시 위기를 키우는 요인으로 지목된다. 보수가 우파로 오해되는 순간, 정당은 확장이 아니라 고립을 선택하게 된다. 보수는 본래 신중함과 책임, 제도 안정성을 중시하며 변화가 필요할 때도 사회적 비용을 고려해 점진적으로 나아간다. 반면 우파는 이념적 선명성을 앞세우며 대결 정치로 기울고 있다.

지금 국민의힘을 향해 제기되는 우려는 바로 이 지점에 있다. 현실 정치의 복잡성을 다루는 보수라기보다 지지층 결집에 의존하는 강경 노선으로 이동하고 있다는 인식이 확산된다면, 중도 확장 능력은 약화될 수밖에 없다. 전국 정당이 진영 정당으로 축소되는 순간 정치적 영향력 또한 제한될 것이다.

더 심각한 문제로 거론되는 것은 당내 민주주의의 위축이다. 건강한 정당이라면 다양한 의견이 제도적으로 조정된다. 그러나 특정 계파가 당의 방향을 좌우하고 다른 목소리가 곧바로 ‘배신’이나 ‘해당 행위’로 규정되는 분위기가 자리 잡는다면, 그것은 민주 정당의 모습과 거리가 멀다.

정치는 결국 미래를 설계하는 일이다. 그런데 지금 국민의힘에서 미래의 청사진이 충분히 제시되고 있는지 의문이 제기되는 것은 자연스럽다. 정권 비판이라는 야당의 기본 책무마저 흔들린다면, 국민은 더 이상 그 정당을 대안 세력으로 보지 않을 것이다. 과연 이 정당이 대한민국 보수를 대표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보수는 한국 정치에서 반드시 필요한 축이다. 균형 없는 민주주의는 오래 지속되기 어렵다. 동시에 보수라는 이름은 자동으로 주어지는 것도 아니다. 책임과 절제, 현실 감각을 잃는 순간 그 자리는 빠르게 비어 버린다. 보수의 위기는 곧 정치 균형의 위기이기도 하다.

정치사는 위기 앞에서 스스로를 바꾸지 못한 보수가 어떻게 사라졌는지도 반복해 보여주었다. 자기 혁신에 성공한 보수는 시대 변화에 적응하며 영향력을 유지했지만, 변화 요구를 외면한 보수는 역사 속에서 급속히 주변화됐다.

일구지학의 함정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정당은 결국 스스로를 소모한다. 서로 다른 듯 대립하지만 국민의 눈에는 같은 권력 투쟁으로 비칠 뿐이다.

지금 국민의힘에 필요한 것은 더 강한 지도자나 더 큰 목소리가 아니다. 요구되는 것은 노선의 재정립과 당내 민주주의의 복원, 그리고 무엇보다 민생을 정치의 중심에 다시 놓는 일이다.

국민의힘이 선택해야 할 길은 분명하다. 보수는 국민보다 높은 곳에 설 수 없다. 계파 정치의 언덕에서 내려와 국민이 서 있는 자리로 돌아올 때에만, 보수는 다시 보수로 남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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