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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쌤의 책방] 영웅의 허울을 벗기니 비로소 사람이 보였다

『삼국지 강의』- 역사와 문학을 넘나들며 삼국지의 진실을 만난다!
이중톈(易中天) 지음|김영사

[봉쌤의 책방] 영웅의 허울을 벗기니 비로소 사람이 보였다

삼국지는 시대가 낳은 가장 거대한 서사다. 천하가 셋으로 갈라지는 과정에서 인물들은 운명을 걸고 싸우지만, 우리가 기억하는 삼국지는 지나치게 단순하다. 조조는 냉혹한 간웅, 유비는 덕을 앞세운 성군, 관우는 의리의 화신, 제갈량은 신묘한 전략가, 모두 정형화된 이미지로 박제되어 있다. 이중톈의 『삼국지 강의』는 바로 이 박제된 이미지를 깨는 데서 출발한다. 그는 우리가 너무도 익숙하게 받아들였던 영웅들의 모습을 완전히 해체한다. 전설 속 인물이 아니라, 살기 위해 고민하고 계산하며 흔들렸던 ‘현실의 사람들’을 데려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책을 펴는 순간, 삼국지의 영웅들은 더 이상 우뚝 솟은 형상이 아니라 손에 닿는 인간으로 다가온다.

가장 먼저 무너지는 인물은 조조다. 우리는 조조를 잔혹하고 음험한 권력자로 이해해 왔다. 그러나 이중톈은 조조의 결단이 성격의 문제가 아니라 환경의 산물이라고 말한다. 난세에서 권력을 잡고 유지하기 위해 그는 누구보다 철저해야 했고, 의심은 생존의 조건이었다. 조조는 잔혹했던 것이 아니라 냉정했다. 냉정해야 살아남았기 때문이다. 그의 행동을 ‘악행’이라 규정하기보다, 왜 현실은 그에게 그런 선택만 남겨 두었는지를 보여주는 설명은 독자로 하여금 조조를 다시 읽게 만든다.

유비에 대한 해석도 신선하다. 유비는 흔히 울고, 비굴해 보일 정도로 사람들에게 매달리는 장면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이중톈은 이 모든 행동을 ‘정치적 선택’으로 분석한다. 그는 약자를 연기한 것이 아니라, 약자라는 처지를 능력으로 전환한 정치적 천재였다. 동정과 신뢰를 얻고, 조직을 만들고, 기회를 기다리는 능력은 유비가 가진 가장 강력한 ‘무기’였다. 덕을 기반에 둔 그의 리더십은 감정의 산물이 아니라, 현실 정치에서 통용되는 가장 정교한 전략이었다는 해석은 유비를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게 한다.

고대에 장안(長安)이라 불렀던 시안(西安)

이 강의의 백미는 영웅의 능력과 시대의 조건을 분리하지 않는 시각이다. 영웅이 영웅인 것은 그 개인의 능력이 아니라, 그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토대가 존재했기 때문이다. 관우의 의리는 관우 개인의 성품이라기보다, ‘의리’라는 가치가 그 시대의 군사적·정치적 문제를 해결하는 핵심 자원이었기 때문에 빛났고, 제갈량의 신중함은 성격이 아니라 구조적 약점을 메우기 위한 필연이었다. 인물의 행동을 미화하거나 비난하는 대신, 시대가 인물에게 부여한 조건을 통해 읽어내는 시각은 깊고 설득력 있다.

특히 제갈량을 둘러싼 신화는 이 책에서 가장 깊이 해체된다. 제갈량은 실패 없는 천재가 아니라, 승산이 점점 줄어드는 판에서 마지막 가능성을 짜내야 했던 전략가였다. 촉한은 태생적으로 약했고, 인구와 재정, 지리와 인재 모두 위·오에 비해 열세였다. 제갈량은 그 열세 속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한 것이다. 그의 신중함은 천재적 성질이 아니라, 실수 단 한 번이 국운을 무너뜨릴 수 있는 상황에서 비롯된 절박함이었다. 이중톈은 이 지점을 집요하게 추적하면서, 신화 대신 인간 제갈량의 고단한 삶을 보여준다. 신화를 걷어내자, 오히려 인물이 더 깊어진다는 것을 깨닫게 한다.

이 책의 힘이 빛나는 지점은 삼국지를 ‘영웅 중심의 이야기’에서 ‘권력 구조의 이야기’로 전환하는 데 있다. 승패는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 시스템의 차이였고, 국가의 흥망은 인물 한 명의 지략보다 조직과 제도의 힘에 달려 있었다. 위가 강했던 이유는 조조의 역량을 넘어 인재풀, 행정 조직, 경제 기반이 견고했기 때문이며, 오가 내부적으로 흔들리지 않았던 이유는 손씨 가문의 절제된 권력 운영 덕분이었다. 반면 촉한은 제갈량이라는 천재를 데리고도 판을 뒤집기 어려웠다. 이중톈은 이 구조의 현실을 통해 ‘역사는 개인이 아니라 시스템이 만든다’는 냉정한 사실을 드러낸다.

후한(後漢) 말기에 의형제를 맺은 유비(劉備), 관우(關羽), 장비(張飛)

삼국지를 읽으며 종종 우리는 “누가 옳았는가, 누가 잘했는가”를 묻게 된다. 그러나 『삼국지 강의』는 질문을 바꾼다. “그들은 왜 그렇게 행동할 수밖에 없었는가?”라는 질문이다. 영웅의 도덕성을 평가하는 대신, 영웅이 놓인 자리와 조건을 분석하게 한다. 그 결과 우리는 영웅을 평가하는 독자가 아니라, 영웅의 고민을 이해하는 독자가 된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시공간을 뛰어넘는 교훈이 도출된다. 권력의 구조는 시대가 달라도 반복되고, 인간은 난세에서 언제나 비슷한 선택 앞에 놓인다는 것이다.

이 강의는 삼국지를 다시 읽게 만든다. 이미 알고 있다고 생각한 의리와 배신, 용맹과 지략, 덕과 간교의 대립은 사실 훨씬 더 복잡했다. 영웅의 진면목은 극적인 장면에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불안과 압박 속에서 어쩔 수 없이 선택한 그들의 사소한 행동에서 드러난다. 신화화된 장면 뒤편에서 인간의 표정이 드러나는 순간, 독자는 마치 처음으로 삼국지를 읽는 듯한 경험을 하게 된다.

『삼국지 강의』가 던지는 가장 큰 메시지는 이것이다. 영웅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진다. 그리고 그들의 운명은 재능이 아닌 선택의 결과물이다. 이중톈은 삼국지를 영웅담에서 인간사로, 인간사에서 권력의 구조로 확장하며 고전을 새롭게 살아 움직이게 한다.

결국 이 책은 우리에게 삼국지를 ‘다시 펼쳐보는’ 기회가 아니라, 삼국지를 처음 만나는 듯한 전율을 선사한다. 허세로 포장된 영웅담을 걷어내고 그 안의 인간을 바라보게 하며, 인간을 넘어 시대와 구조를 읽어내는 눈을 열어준다. 이것이야말로 이중톈이 남긴 가장 깊고 아름다운 유산이다. 시간이 흘러도 삼국지는 숨 쉬고, 그의 강의는 그 숨결을 다시 뜨겁게 되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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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Jessica395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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