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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 시간] 청신고절, 가인(街人)이 세운 사법의 기준

[기억의 시간] 청신고절, 가인(街人)이 세운 사법의 기준
가인(街人) 김병로(金炳魯)는 스스로를 제약함으로써 사법의 독립을 세운 대한민국 사법부의 창립자였다.
할아버지의 초상을 바라보는 김종인

2026년 1월 13일은 대한민국 초대 대법원장 김병로가 세상을 떠난 지 62년이 되는 날이다. 해방 이후 혼란과 권력의 공백 속에서 대한민국 사법부의 첫 기준을 세운 인물, 그의 호 ‘가인(街人)’은 오늘까지도 사법이 지향해야 할 태도를 상징하는 이름으로 남아 있다. 김병로의 업적은 화려한 판결이나 정치적 영향력이 아니라, 사법이 무엇이어야 하는지를 분명히 규정한 데 있었다.

김병로가 남긴 사법의 핵심은 청신고절(淸身高節)이라는 말로 요약된다. 이 표현은 《후한서(後漢書)·양진전(楊震傳)》에서 비롯된다. 후한의 관리 양진이 밤중에 뇌물을 거절하며 “하늘이 알고, 땅이 알고, 그대가 알고, 내가 안다(天知 地知 子知 我知)”고 말한 일화는, 공직자의 도덕이 외부의 감시가 아니라 스스로 설정한 기준에서 출발해야 함을 보여준다. 청신은 몸을 맑게 하는 것이고, 고절은 절개를 높이 지키는 것이다. 김병로는 이 고사성어를 삶의 윤리로 삼아, 사법부의 독립을 개인의 결단과 태도의 문제로 끌어올렸다.

그가 초대 대법원장으로서 가장 먼저 한 일은 권한을 확장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한계를 설정하는 일이었다. 해방 직후 사법제도는 미완이었고, 정치권력은 법원을 국가 운영의 도구로 삼으려는 유혹에 노출돼 있었다. 김병로는 이 시기에 법원이 정권의 안정을 돕는 기관이 되는 순간, 법은 더 이상 정의의 언어를 사용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그는 사법부가 권력과 일정한 긴장을 유지해야만 국민 앞에 설 수 있다고 보았다.

그의 재임 시절 사법부는 결코 편안한 위치에 있지 않았다. 판결은 때로 정치적 반발을 불러왔고, 사법부는 정권과 반복적으로 충돌했다. 그러나 김병로는 이를 회피하지 않았다. 그는 판결이 환영받는지 여부보다, 판결이 독립적으로 내려졌는지를 더 중요하게 여겼다. 그 결과 사법부는 비록 외롭고 고립돼 보일지라도, 최소한 권력의 눈치를 보지 않는 기관이라는 신뢰를 국민에게 남길 수 있었다.

김병로의 업적은 제도 정비보다 사법 문화의 정립에 있었다. 그는 판사를 행정 관료나 기술자로 보지 않았다. 판사는 법률 지식 이전에 태도를 갖춰야 하며, 판결문 이전에 삶의 자세가 분명해야 한다고 믿었다. 사법은 완전할 수 없지만, 불완전함을 인정하는 태도 속에서 존엄을 유지할 수 있다는 인식이었다. 그래서 그는 판결의 정답보다 판사의 자세를 중시했고, 사법은 언제나 비판받을 준비가 돼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가인이라는 호는 그의 사법관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그는 법관을 높은 단 위에 올려놓지 않았다. 거리의 사람, 즉 시민의 눈높이에서 법을 바라보는 존재로 규정했다. 사법의 권위는 위엄에서 나오지 않고, 거리두기와 절제에서 비롯된다는 그의 인식은 오늘날에도 유효한 기준으로 남아 있다.

김병로가 남긴 사법의 방향은 명확하다. 권력과 가까워지지 않는 사법, 편안함보다 불편함을 선택하는 사법, 설명을 회피하지 않는 사법이다. 그의 시대는 오래전에 끝났지만, 그가 세운 기준은 아직 현재형이다. 사법이 존경받았던 이유는 완벽했기 때문이 아니라, 스스로를 경계할 줄 알았기 때문이다.

김병로의 62주기는 단순한 추모의 날이 아니다. 그것은 대한민국 사법부가 어디서 출발했고, 무엇을 잃지 말아야 하는지를 다시 확인하는 시간이다. 기억은 과거를 기리는 데서 멈추지 않는다. 오늘의 사법을 비추는 기준이 될 때 비로소 살아 있다. 가인(街人)이 남긴 이름이 여전히 불편하게 다가오는 이유는, 그 기준이 지나치게 이상적이어서가 아니라 우리가 아직 그 높이에 충분히 서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사법이 다시 존경받기 위해 필요한 것은 새로운 권한도, 더 많은 침묵도 아니다. 가인이 남긴 질문 앞에 오늘의 사법이 정직하게 서는 일, 그 불편함을 회피하지 않는 태도에서 다시 시작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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