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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정체성 상실의 시대, 정치의 거울은 어디에 있는가

【사설】 정체성 상실의 시대, 정치의 거울은 어디에 있는가
정치는 기억 위에 세워진다. 특히 헌정사의 상처로 남은 정권의 시절이라면 더욱 그렇다.
그 시대의 권력 중심에 있었던 경력을 오늘의 정치적 자산으로 소환한다면, 그 시간에 대한 평가와 책임 또한 함께 제시해야 마땅하다.

정체성 상실의 시대다. 뻔뻔함이 능력으로 둔갑하고, 일관성 없는 말과 행동이 ‘현실 감각’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다. 반성과 자기성찰은 사라지고, 오로지 자신의 이익과 영달만을 좇는 태도가 공공연한 생존 방식처럼 통용된다. 우리는 과연 어디로 가고 있는가.

최근 한 정치인이 현재 몸담고 있는 정당과 정면으로 대립해 온 상대 정파 정권 시절의 직함, 그것도 ‘대통령 직속 청년위원회 위원장’이라는 상징적 자리를 공식 경력으로 내세운 일이 논란이 됐다. 규정상 허용 범위라는 해명이 뒤따랐지만, 많은 이들이 느낀 당혹감은 단순한 절차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것은 상식의 문제였다.

정당은 단순한 선거 기구가 아니다. 일정한 가치와 역사, 노선을 공유하는 정치적 공동체다. 그런 공동체의 일원으로 나서면서 과거 상대 진영 권력의 핵심 직함을 아무런 성찰 없이 전면에 배치한다면, 이는 기술적 정당성을 넘어 정치적 감수성의 문제로 이어진다. 법적으로 가능하다는 설명은 충분조건이 되지 못한다. 공직을 꿈꾸는 이라면 법 이전에 국민의 눈높이를 먼저 헤아려야 한다.

정치는 기억 위에 세워진다. 특히 헌정사의 상처로 남은 정권의 시절이라면 더욱 그렇다. 그 시대의 권력 중심에 있었던 경력을 오늘의 정치적 자산으로 소환한다면, 그 시간에 대한 평가와 책임 또한 함께 제시해야 마땅하다. 그러나 설명은 빈약했고, 태도는 방어적이었다. 상식의 질문에 상식의 언어로 답하지 못한 셈이다.

공자는 《논어(論語)》 헌문편(憲問篇)에서 “수기이안백성(修己以安百姓)”이라 했다. 자신을 먼저 닦아야 백성을 편안하게 할 수 있다는 뜻이다. 여기서 비롯된 말이 곧 수기치인(修己治人)이다. 자신을 바로 세우지 못한 채 남을 다스리겠다고 나서는 것은 순서가 뒤바뀐 일이라는 경계다. 정치란 결국 공공을 책임지는 일이다. 그 출발점은 언제나 자기 성찰이어야 한다.

오늘 우리 사회가 불신의 늪에 빠진 이유는 거창한 이념의 충돌 때문만은 아니다. 말과 행동의 간극, 과거와 현재의 모순, 그리고 그것을 아무렇지 않게 넘기는 태도 때문이다. 유리할 때는 과거를 자랑하고, 불리할 때는 기억을 접는 행위가 반복될수록 국민의 신뢰는 조금씩 깎여 나간다.

천민자본주의라는 말이 회자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모든 것이 거래의 대상이 되고, 가치마저 계산의 문제로 환원되는 사회에서 정치 역시 예외일 수 없다. 직함은 경력의 일부가 아니라 상징이다. 그 상징을 선택하는 순간, 그에 따르는 역사적 의미와 도덕적 책임도 함께 짊어져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정치는 신념이 아니라 이익의 이동 경로로 보일 뿐이다.

상식은 결코 높은 기준이 아니다. 상대 정파 정권의 핵심 직함을 사용할 때는 최소한의 설명과 성찰이 있어야 한다는 것, 그것이 현재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가치와 어떻게 조화를 이루는지 밝히는 것이 책임이라는 것. 이것이 그리 과도한 요구인가.

정체성은 선언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반복된 선택과 태도의 축적이 곧 정체성이다. 반성과 자기성찰이 사라진 자리에는 공허한 수사만 남는다. 수기치인의 가르침은 고전 속 문장이 아니라 오늘 정치에 가장 절실한 기준일지 모른다.

정치는 거울 앞에 서는 일이다. 그 거울에 비친 모습이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을 때, 국민도 비로소 마음을 연다. 정체성 상실의 시대를 벗어나는 길은 멀리 있지 않다. 자신을 먼저 바로 세우는 데서 시작된다. 그것이 정치의 기본이며, 공동체를 지탱하는 최소한의 약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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