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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쌤의 책방】 ‘한국 사람’이라는 질문 – 우리는 누구인가?

『한국 사람 만들기 4: 친일개화파2』
함재봉 지음 | 에이치(H) 프레스

【봉쌤의 책방】 ‘한국 사람’이라는 질문 – 우리는 누구인가?

어떤 시대는 사건으로만 남고, 어떤 시대는 질문으로 남는다. 1894년 전후의 조선은 분명 사건이 많았다. 너무 많아서, 오히려 생각할 틈이 없을 정도로.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 시리즈를 만나고나면 기억에 또렷이 남는 건 전투의 이름이나 조약의 조항이 아니다. 자꾸만 하나의 문장이 머리를 친다. 우리는 왜 그때, 그렇게까지 흔들렸을까.

『한국 사람 만들기』 네 번째 권은 갑신정변 이후의 조선을 길게 끌고 간다. 김옥균의 죽음, 동학농민군의 봉기, 청일전쟁, 갑오경장, 삼국간섭, 을미사변, 단발령, 그리고 아관파천. 교과서에서는 줄로 엮여 있던 사건들이 여기서는 서로 부딪치고, 엇갈리고, 뒤틀리며 이어진다. 읽다 보니 어느 한 장면에서 선뜻 분노하거나 안도하기가 어려워졌다. 누군가를 쉽게 영웅이라 부르기도, 매도하기도 망설여진다. 판이 이미 기울어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은 선택을 못 한 나라라기보다, 선택의 폭이 지독하게 좁았던 나라에 가까웠다.

갑오경장을 다루는 부분에서는 잠시 책장을 덮었다. 우리가 배워온 “근대화의 출발”이라는 문장이 너무 가볍게 느껴져서다. 개화파의 이상이 허구였다고 말할 수는 없다. 분명히 무언가를 바꾸고 싶었을 것이다. 다만 그 변화의 문이 일본군의 총구 옆에서 열렸다는 사실이 마음을 몹시 불편하게 한다. 경복궁이 점령된 자리에서 시작된 개혁이라니. 홍범 14조의 문장은 지금 읽어도 낯설지 않지만, 그것을 떠받친 권력의 다리는 이미 금이 가 있었다. 저자는 그 금을 과장하지도, 감추지도 않는다. 그저 보여준다. 그래서 더 아프다.

동학농민운동을 읽을 때는 또 다른 복잡함이 따라온다. 동학은 단순한 난도 아니고, 그렇다고 아름답게만 포장할 수도 없다. 외세를 물리치자는 외침과 탐관오리에 대한 분노, 그리고 생존의 절박함이 한데 뒤섞여 있었다. 그런데 그 절규가 국제정치라는 거대한 톱니바퀴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순간, 이야기는 개인의 의지를 넘어선다. 청의 파병, 일본의 개입, 전쟁의 확전. 농민의 발걸음이 어느새 제국의 계산표 위에 올라 있는 장면을 읽으며, 솔직히 몇 번 숨을 고르게 됐다.

삼국간섭 이후는 더 서늘하다. 승리한 줄 알았던 일본이 랴오둥반도를 반환하고, 러시아의 그림자가 길게 드리운다. 조선 내부는 다시 갈라진다. 을미사변과 단발령은 단순한 정책이 아니라, 사람들의 일상과 자존을 건드리는 사건이었다. 그리고 아관파천. 왕이 공사관으로 몸을 옮겨야 했던 그 장면을 떠올리면, 국가라는 틀이 얼마나 위태로웠는지 실감하게 된다. 그때 과연 무엇이 남아 있었을까. 체면? 주권? 아니면 버텨야 한다는 의지뿐이었을까.

이 책의 장점은 판단을 서두르지 않는 데 있다. ‘친일개화파’라는 말은 이미 결론을 품고 있다. 하지만 저자는 그 결론을 강요하지 않는다. 변호하지도 않고, 단죄하지도 않는다. 대신 그들이 놓여 있던 조건을 끝까지 따라간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깨닫게 된다. 역사는 선과 악의 대결이라기보다, 힘의 차이가 만들어낸 선택지의 싸움이라는 사실을.

읽는 동안 여러 번 멈췄다. 이미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사건들이 전혀 다른 무게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청일전쟁은 두 나라의 전쟁이었지만, 동시에 조선의 운명을 재단하는 칼날이기도 했다. 갑오경장은 개혁이었지만, 동시에 외세의 그림자 아래 놓인 실험이었다. 그 경계가 자꾸 흐려진다.

역사를 읽는다는 건 과거를 재단하는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오히려 지금의 나를 돌아보는 일에 가깝다. 우리는 얼마나 다른가. 외부의 압력과 내부의 분열 속에서, 우리는 과연 더 단단해졌다고 말할 수 있을까. 책을 다 읽고 나서도 쉽게 고개를 끄덕일 수 없었다.

한동안 책을 책상 위에 그대로 두었다. 덮어두었지만, 마음에서는 닫히지 않았다. 분명한 답을 얻은 느낌은 아니다. 대신 불편한 질문 하나를 얻었다. 격랑의 시대를 단순하게 정리해버리는 순간, 우리는 또다시 같은 자리에 설지 모른다는 경고.

역사는 끝난 문장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아직 진행형이다. 우리가 어떻게 읽고, 어떻게 기억하느냐에 따라 모양이 조금씩 달라질 뿐. 그래서 이 책은 과거를 설명하는 책이면서도, 이상하게 현재를 향해 말을 건다. 그리고 그 말이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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