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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 시간] 아무도 부르지 않고 지우려 했던 이름의 시간

[기억의 시간] 아무도 부르지 않고 지우려 했던 이름의 시간

그는 가난에서 출발했지만, 가난에 머물지 않았다. 불우한 유년을 지나 스스로 일어섰고, 손으로 기술을 익혔으며, 머리로 세상을 읽었다. 선택할 수 있는 길이 없어서 싸운 사람이 아니었다. 오히려 선택지가 있었음에도, 그중 가장 험한 길을 택한 사람이었다.

지금의 종로구 효제동 좁은 골목에서 태어나 일찍 아버지를 잃었다. 낮에는 철공장에서 일하고 밤에는 야학에서 공부했다. 몸은 쇠를 다뤘지만 시선은 세상으로 향해 있었다. 개신교 신앙을 통해 인간의 존엄과 자유라는 개념을 접했고, 영어학교에서 국제 정세와 제국의 논리를 배웠다. 식민지 조선의 청년으로서는 드물게, 그는 세계를 이해하는 언어를 갖추고 있었다.

청년기의 그는 ‘성공한 사업가’였다.
동대문 밖에서 연 철물상은 곧 철공소로 성장했고, 직원 수십 명을 거느릴 만큼 번창했다. 국산품을 만들어 팔았고, 수입품을 대체할 물산을 고안했다. 말총모자는 시대의 유행이 되었고, 상당한 수익을 안겼다. 가족을 부양하고, 재산을 불리고, 조용히 살아갈 조건은 이미 충분했다. 식민지 조선에서 그것은 드문 안정이자, 드문 성공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 안정을 ‘삶’이라 부르지 않았다. 돈은 손에 쥘 수 있었지만, 자유는 그렇지 않았다. 재물은 축적할 수 있었지만, 존엄은 타협의 대상이 아니었다. 개인의 번영이 민족의 굴종 위에 세워질 때, 그것은 언제든 빼앗길 수 있다는 사실을 그는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의 사업은 곧 다른 역할을 하기 시작했다. 번 돈은 독립자금이 되었고, 작업장은 은신처가 되었으며, 기술은 무장이 되었다. 그는 사업을 버린 것이 아니라, 사업의 목적을 바꿨다. 축적을 위해 벌던 돈을 해방을 위해 쓰기 시작한 것이다. 재물은 수단이었고, 목표는 분명했다.

3·1운동 이후, 그는 더 이상 돌아갈 수 없는 선을 넘었다. 태극기를 찍어내고, 동지들과 거리로 나섰다. 비밀결사를 조직하고, 선전물을 배포했다. 그리고 마침내 총을 들었다. 이 선택은 충동이 아니었다. 윤택한 삶을 충분히 살아본 뒤에 내린 결론이었다. 자유 없는 부는 오래가지 못하고, 독립 없는 번영은 허상이라는 판단이었다.

도시의 골목에서 총성이 울렸을 때, 그는 이미 모든 것을 내려놓은 뒤였다. 되돌아갈 사업도, 지켜야 할 재산도 남아 있지 않았다. 남은 것은 결심뿐이었다. 수백의 추격 속에서도 그는 항복하지 않았다. 골목을 넘고, 담을 넘고, 밤을 건너며 버텼다. 총알이 몸을 꿰뚫었지만 결심은 꺾이지 않았다.

이 지점에서 기억은 하나의 사실을 더 마주하게 된다.
일제는 그의 이름을 지우려 했다.

이유는 분명했다. 그는 총독부의 상징이던 종로경찰서를 공격했고, 도심 한복판에서 일본 경찰을 상대로 시가전을 벌였다. 무엇보다 끝내 체포되지 않은 채 순국했다. 이는 일제가 가장 두려워한 유형의 저항이었다. ‘질서가 완전히 통제되고 있다’는 식민 통치의 신화를, 단 한 사람으로 깨뜨린 존재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식민 권력은 선택했다.
사건은 과장하되 인물은 흐릿하게 만들고, 이름은 신문 지면에서 최소화했다. 그는 ‘독립운동가’가 아니라 ‘무장폭도’였고, ‘의사’가 아니라 ‘흉도’로 기록됐다. 기억의 대상이 아니라 관리의 대상으로 분류됐다. 식민 권력에게 그는 기억되면 안 되는 이름이었다.

그는 마지막 순간 ‘대한 독립 만세’를 외쳤다. 그리고 남은 탄환 하나로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그때 그의 나이는 만 34세였다. 부를 축적하고 안정을 누리기에도, 인생을 다시 설계하기에도 충분한 나이였다. 그러나 그는 그 시간을 자신만의 삶으로 남겨두지 않았다.

기억은 여기서 우리를 불편하게 만든다.
왜 그렇게까지 해야 했는가라는 질문보다, 왜 그는 그렇게 할 수 있었는가라는 질문이 먼저다. 선택지가 없어서가 아니라, 선택지가 있었음에도 가장 힘든 길을 골랐다는 사실이 우리를 멈춰 세운다.

103년이 지났다.
1923년 1월 22일, 경성의 골목에서 만 서른넷의 나이로 모든 것을 내려놓고 끝까지 싸운 독립운동가.
아무도 부르지 않고, 지우려 했던 그 이름은 김상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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