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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미국이었다면 불출석은 선택지가 아니었다

[사설] 미국이었다면 불출석은 선택지가 아니었다
지난 2021년 3월 11일(현지 시각) 뉴욕증권거래소 앞에서 쿠팡Inc 상장 기념으로 사진을 찍는 김범석 의장. (사진제공=쿠팡)

국회가 오늘 쿠팡 개인정보 유출 사태에 대한 청문회를 열 예정이지만, 쿠팡 창업자이자 이사회 의장인 김범석 씨는 끝내 출석하지 않겠다는 뜻을 밝혔다. 해외 일정과 미국 법인이라는 이유가 제시됐지만, 수천만 명의 개인정보가 유출된 중대 사안의 핵심 책임자가 공적 검증의 자리를 피한 장면은 가볍게 넘길 일이 아니다. 이 선택은 단지 한 기업인의 태도 문제가 아니라, 한국 사회의 기업 책임 시스템이 어디까지 허용되고 있는지를 드러낸다.

미국에서였다면 상황은 전혀 달랐을 것이다. 대규모 개인정보 유출 사고가 발생하면, 의회는 곧바로 청문회를 열고 최고경영자나 이사회 의장을 증인으로 소환한다. 이때 출석은 권고가 아니라 사실상의 의무다. 정당한 사유 없는 불출석은 ‘의회 모독(Contempt of Congress)’으로 이어질 수 있고, 벌금이나 형사 처벌 가능성도 배제되지 않는다. 실제로 페이스북의 마크 저커버그, 에퀴팩스 CEO 등은 모두 직접 증인석에 앉아 질문을 받았다. 미국에서 “바빠서 못 나온다”는 설명은 통용되지 않는다.

처벌은 청문회 출석 여부에 그치지 않는다. 미국 기준으로 쿠팡과 같은 규모의 개인정보 유출이 발생했다면, 연방거래위원회(FTC)의 제재, 주(州) 검찰총장들의 집단 소송, 피해자들의 집단소송이 동시에 진행됐을 가능성이 크다. 에퀴팩스는 1억 명이 넘는 개인정보 유출로 약 7억 달러의 합의금을 냈고, 메타는 개인정보 보호 위반으로 50억 달러의 벌금을 부과받았다. 여기에 수년, 길게는 20년에 이르는 강제 보안 감시와 이사회 책임 강화 조치가 뒤따랐다.

이를 쿠팡 사안에 대입하면 그림은 더 분명해진다. 피해 규모가 수천만 명에 달하고, 유출 사실 인지와 공개가 지연됐으며, 최고 책임자의 공개적 설명이 없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벌금과 배상 규모는 수천억 원을 넘어 조 단위로 치솟았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무엇보다 이사회 의장 개인의 책임이 집중적으로 검증 대상이 됐을 것이다. 미국에서는 “회사를 키운 창업자”라는 이유가 면책 사유가 되지 않는다. 오히려 지배력과 영향력이 클수록 책임도 무거워진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어떤가. 핵심 책임자는 불출석하고, 실무 책임자나 대리인이 대신 나와 설명하는 장면이 반복된다. 국회 증언·감정 제도의 실효성은 약하고, 개인정보 침해에 대한 집단적 피해 구제 수단도 제한적이다. 결과적으로 기업은 사과문과 조직 개편으로 위기를 넘기고, 최고 책임자는 직접 책임을 묻는 자리에서 비켜 설 수 있다.

이제 질문은 김범석 의장 개인을 넘어선다. 한국 사회는 언제까지 “해외 법인”과 “글로벌 일정”을 방패 삼아 공적 책임을 회피하는 구조를 용인할 것인가. 플랫폼 기업과 글로벌 대기업이 한국에서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시대에, 책임의 기준만 과거에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된다.

제도 개선의 방향은 분명하다. 대규모 개인정보 유출과 같은 중대 사건에 대해서는 최고 의사결정권자의 국회 출석 의무를 강화하고, 정당한 사유 없는 불출석에는 실질적 제재가 뒤따라야 한다. 개인정보 침해에 대한 집단소송과 징벌적 손해배상 역시 현실화할 필요가 있다. 기업의 규모와 영향력에 비례한 책임을 묻지 못한다면, 신뢰 회복은 공허한 구호에 그칠 것이다.

기업은 기술로 성장하지만, 책임으로 존속한다. 미국이었다면 불출석은 선택지가 아니었을 것이다. 한국에서조차 그 선택이 통하지 않는 사회로 나아갈 수 있을지, 이번 쿠팡 청문회는 우리 제도의 현주소를 가늠하는 장면이 되고 있다.

top_tier_1@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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