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현역’ 배우 이순재 별세…한국 연기의 큰 별 지다

현역 ‘최고령 배우’로 활동해온 배우 이순재가 별세했다. 향년 91세.

유족에 따르면 이순재는 25일 새벽 세상을 떠났다. 그는 고령에도 철저한 건강관리를 해온 데다 방송, 영화, 연극 등 장르를 가리지 않고 연기 활동을 이어왔다. 최근까지도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를 기다리며’와 KBS 2TV 드라마 ‘개소리’ 등에 출연하며 활발한 모습을 보였다.

1934년 함경북도 회령에서 태어난 이순재는 4살 때 조부모를 따라 서울로 내려왔으며, 호적상 출생연도는 1935년이다. 어린 시절 남대문 시장에서 할아버지를 도우며 장사를 했고, 초등학교 시절 해방을 맞이했다. 고등학교 1학년 때는 한국전쟁을 겪었다.

이순재가 연기의 길로 들어선 계기는 대학 시절이다. 서울대 철학과에 진학한 그는 당시 대학생들의 저렴한 취미였던 영화 보기에 빠졌고, 영국 배우 로렌스 올리비에가 출연한 영화 ‘햄릿’을 보고 배우의 꿈을 키웠다. 1956년 연극 ‘지평선 넘어’로 데뷔한 뒤, 1965년 TBC 1기 전속 배우가 되며 한국 방송 역사와 함께해 왔다.

그가 출연한 주요 드라마는 ‘나도 인간이 되련다’, ‘동의보감’, ‘보고 또 보고’, ‘삼김시대’, ‘목욕탕집 남자들’, ‘야인시대’, ‘토지’, ‘엄마가 뿔났다’ 등 140편에 달한다. 단역까지 포함하면 작품 수는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방대하며, 한 달에 30편 넘는 작품에 출연한 적도 있었다.

대표작 중 하나인 드라마 ‘사랑이 뭐길래’(1991~1992)는 시청률 65%를 기록했다. 그는 가부장적 아버지를 대표하는 캐릭터 ‘대발이 아버지’로 당시 사회 분위기 속에서 큰 공감을 얻었다.

사극 분야에서도 두각을 나타냈다. ‘사모곡’, ‘인목대비’, ‘상노’, ‘풍운’, ‘독립문’ 등 1970·80년대 사극에 꾸준히 출연했고, 이후 ‘허준’(1999), ‘상도’(2001), ‘이산’(2007) 등에서 묵직하고 카리스마 있는 연기로 사극 전성시대를 이끌었다.

이순재는 연기 경지에 오른 뒤에도 끊임없이 자신의 폭을 넓혔다. 70대에 들어 출연한 시트콤 ‘거침없이 하이킥’(2006), ‘지붕 뚫고 하이킥’(2009)에서는 기존의 근엄한 이미지를 깨고 뛰어난 코믹 연기로 큰 사랑을 받았다. 이른바 ‘야동 순재’ 캐릭터로 어린이 팬층까지 생겼다.

예능에서도 활약했다. ‘꽃보다 할배’(2013)에서는 지치지 않는 체력과 의욕 넘치는 모습으로 ‘직진 순재’라는 별명을 얻으며 나이를 잊은 열정을 보여줬다.

구순을 앞둔 나이에도 무대와 작품 활동을 이어갔다. 연극 ‘장수상회’(2016), ‘앙리할아버지와 나’(2017), ‘리어왕’(2021)에 출연해 열연을 펼쳤고, 특히 ‘리어왕’에서는 200분에 달하는 대사량을 완벽히 소화해 찬사를 받았다. 2023년에는 연출자로 나서 안톤 체호프의 희곡 ‘갈매기’를 대극장 무대에 올렸다.

이순재는 배우 활동 외에도 제14대 국회의원(민주자유당)을 지내며 잠시 정치권에 몸담기도 했다. 1992년 14대 총선에서 민주자유당 후보로 서울 중랑갑에 출마해 당선됐으며, 민자당 부대변인과 한일의원연맹 간사 등을 역임했다.

또한 연기자 지망생들을 위해 꾸준히 교육 활동을 이어왔고, 최근까지 가천대 연기예술학과 석좌교수로 후학을 양성했다.

jungjae@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