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 극단 노란리본 이야기…”우리 아이들 너무 아프게만 기억하지 말아달라”
(서울=연합뉴스) 김정진 기자 = 2015년 10월, 세월호 참사로 아이를 잃고 슬픔에 빠져있던 엄마들은 연극을 처음 만난다.
집 밖으로 나서기 어려워하던 엄마들이 심리 치료의 일환으로 배웠던 바리스타 수업이 끝나고, 지나가듯 얘기했던 ‘연극도 재밌겠다’는 말 한 마디가 발단이 됐다.
세월호 엄마들이 연극을 하고 싶어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한달음에 달려온 극단 걸판 출신 김태현 감독은 연극을 어렵게 생각하는 엄마들을 위해 희곡 읽기로 모임을 시작한다.
그리고 이 모임은 3년간 전국을 돌아다니며 200회가 넘는 공연을 한 지금의 4·16 가족극단 ‘노란리본’이 됐다.
다큐멘터리 ‘장기자랑’은 세월호 참사 피해자 가족으로 구성된 극단 노란리본에 대한 이야기다. 극단의 세 번째 작품이자 첫 번째 창작극인 ‘장기자랑’의 준비 과정부터 2021년 단원고 공연까지의 여정을 담았다.
영화는 세월호 참사를 소재로 한 여느 다큐멘터리와는 사뭇 다르다. 이소현 감독은 참사로 인한 상흔을 안고 사는 엄마와 처음 접한 연극에 열정을 보이는 중년 여성, 두 정체성을 모두 담아내면서 절대 무겁지만은 않은 작품을 만들어냈다
작품에 등장하는 일곱 명의 엄마는 각자 다른 개성을 뽐낸다. 뮤지컬 배우를 꿈꾸던 딸처럼 끼가 넘치는 예진 엄마 박유신, 연극에 대한 열정 하나만큼은 누구보다 뜨거운 영만 엄마 이미경, 늘 극단을 묵묵히 지키는 수인 엄마 김명임, 필요할 땐 주저하지 않고 쓴소리를 내는 동수 엄마 김도현, 외유내강 애진 엄마 김순덕, 감초 역할을 톡톡히 해내는 순범 엄마 최지영, 주인공이 아니라도 좋다는 극단의 마지막 합류자 윤민 엄마 박혜영까지.
빈 사무실에서 늦게까지 연극 안무 연습에 매진하고, 화분에 물을 주면서도 대사 외우기에 열심인 모습, 주인공 자리를 놓고 벌어진 갈등은 ‘참사 피해자’라는 프레임 뒤에 감춰져 있던 엄마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하지만 이미 그들의 삶이 되어버린 세월호 참사는 순간순간 나타나 마음을 울린다.
아들이 만든 로봇에 쌓인 먼지를 몇 번이고 닦아내는 동수 엄마, 아이가 왜 죽었는지 명확하게 밝혀질 때까지 머리색을 노랗게 하겠다며 혼자 염색하는 순범 엄마, 랩을 좋아하던 아들을 생각하며 랩 가사를 읊는 영만 엄마, 단원고 공연을 앞두고 무대에 오르기 직전까지 눈물을 훔치는 엄마들의 모습이 그렇다.
연극 ‘장기자랑’의 내용도 마찬가지다. 제주도 수학여행에서 선보일 장기자랑을 준비하는 고등학교 2학년 학생들의 이야기를 그린 이 연극에는 참사로 희생된 아이들의 흔적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뮤지컬 배우를 꿈꾸던 예진이를 닮은 반장 조가연, 모델이 되고 싶다던 순범이를 닮은 방미라, 동수가 좋아하던 만화 ‘원피스’의 주인공 루피까지 지금은 하늘의 별이 된 아이들의 이야기가 녹아있다. 우여곡절 끝에 한 명도 빠짐없이 제주도에 도착한 등장인물들이 바다를 보며 기뻐하는 모습은 마음 한구석을 저릿하게 만든다.
이소현 감독은 시사회 직후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관객에게 어머니들을 참사 피해자가 아니라 우리 옆에 있는 이웃으로, 흔히 볼 수 있는 친구 같은 느낌으로 소개하고 싶었다”고 연출 의도를 설명했다.
고(故) 이영만 군의 어머니는 “아이를 잃고 이렇게 평범하지 않은 삶을 살고 있는 엄마들의 평범한, 보통 사람과 다를 바 없는 이야기”라며 연극을 통해 제 안의 슬픔을 조금씩 덜어내면서 새로운 꿈을 꾸게 됐다”고 말했다.
고 정예진 양의 어머니 박유신 씨는 “영화를 보니까 감독님께서 저한테 예진이 얘기를 물어보실 때 제가 웃고 있더라. 우리 아이들 너무 아프게만 기억하지 마시고 너무 맑았고, 깨끗했고, 이 세상을 조금이라도 변화시켰다고 기억해주셨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전했다.
내달 5일 개봉. 92분. 12세 관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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