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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 시간】 실패를 짊어지고 조국을 남긴 사람

【기억의 시간】 실패를 짊어지고 조국을 남긴 사람
1907년(광무 11)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개최된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 파견된 특사들로, 왼쪽부터 정사(正使) 이상설(李相卨, 1870~1917), 부사(副使) 이준(李儁, 1859~1909), 통역관(譯官) 이위종(李瑋鍾, 1887~미상)이다. (사진제공=우리역사넷)

1917년 3월 2일, 척박했던 만주 벌판과 연해주의 설원을 떠돌던 한 망명객이 숨을 거두었다. 오늘 2026년 3월 2일은 그가 세상을 떠난 지 109주기가 되는 날이다. 109년이라는 시간은 한 세기를 훌쩍 넘겼지만, 그가 남긴 질문은 아직 현재형이다.

그는 전통의 마지막 문을 통과한 사람이었다. 1894년, 조선 시대 마지막 과거시험이라 불리는 갑오년 식년시 문과에 급제했다. 왕조 500년의 선발 체계가 막을 내리던 해, 그는 그 제도의 정점에 올랐다. 그러나 시대는 그에게 안온한 관료의 길을 허락하지 않았다. 과거 급제자의 붓은 곧 국제공법을 번역하는 펜이 되었고, 산술을 가르치는 분필이 되었다. 지식은 출세의 사다리가 아니라 국권을 지키는 방패였다.

1905년 을사조약의 소용돌이 속에서 그는 대신회의 문 앞에서 가로막혔다. 황제에게 조약 인준을 거부하라는 상소를 거듭 올렸으나 역사는 다른 방향으로 흘렀다. 종로 거리에서 국권 회복을 외치며 자결을 시도했다는 기록은, 그가 이성의 학자이면서도 뜨거운 심장을 지녔음을 보여준다. 절망은 그를 침묵하게 하지 않았다.

1907년, 밀서를 품고 유럽으로 향했다.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의 문턱은 끝내 열리지 않았다. 일본의 방해로 공식 석상에는 서지 못했지만, 그는 각국 대표와 언론 앞에서 대한의 억울함을 호소했다. “한국은 자주국”이라는 문장은 회의장의 의사록에 오르지 못했을지언정, 국제 여론의 지면에 남았다. 외교의 실패였으나, 침략의 부당성을 세계에 각인시킨 기록이었다.

망명 이후의 삶은 더욱 고단했다. 중국 룽징(龍井)에 학교를 세워 아이들에게 수학을 가르쳤고, 블라디보스토크에서는 교민을 규합해 단체를 조직했다. 망명정부의 싹을 틔웠으나 국제정세의 벽에 가로막혔다. 조직은 해산되었고, 계획은 좌절되었으며, 동지들은 체포되거나 흩어졌다. 그의 생애는 성공보다 실패의 연대기에 가까워 보인다.

그러나 그는 말했다. “실패가 내 운명일 수는 있어도, 내 조국의 실패는 될 수 없으리라.” 개인의 좌절과 민족의 운명을 구분한 이 한 문장은, 오늘의 우리에게도 낯설지 않은 울림을 준다. 국가는 하루아침에 완성되지 않는다. 한 세대의 실패 위에 다음 세대의 토대가 쌓인다. 그는 자신의 좌절을 다음 세대의 디딤돌로 삼고자 했다.

임종을 앞두고 그는 유해를 불태워 바다에 날리고, 제사도 지내지 말라 했다. 조국이 광복되지 못했는데 어찌 고혼이 돌아가겠느냐는 절박함이었다. 기억조차 사치라 여긴 그 결기는 오히려 우리로 하여금 더 오래 기억하게 만든다. 안중근 의사가 가장 존숭(尊崇)한다고 밝힌 인물이기도 했던 그 사람은, 무장투쟁의 총성과 외교의 언어를 함께 이해한 드문 지도자였다.

교육자였고, 외교관이었으며, 독립운동가였다. 전통의 과거 급제자였으되 근대의 학문을 품었고, 회의장에 들어서지 못했으되 세계를 향해 외쳤으며, 실패를 거듭했으되 조국의 실패만은 부정했다. 오늘 109주기를 맞는 그의 이름을 우리는 뒤늦게 부른다.

이상설(李相卨) !

기억은 추모로 끝나지 않는다. 기억은 질문이 된다. 우리는 지금 무엇을 지키고 있으며, 무엇 앞에서 물러서지 않고 있는가. 3월 2일, 기억의 시간은 과거를 향해 열려 있지만, 그 문은 결국 오늘을 비추고 있다.

top_tier_1@naver.com

  • Michelle4192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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