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사반장’의 강직한 형사부터 ‘전원일기’의 정겨운 김 회장까지, 오랜 세월 안방극장을 지키며 한국의 아버지상을 보여준 배우 최불암이 별세했다. 향년 87세.
30일 방송계와 유족 등에 따르면 최불암(본명 최영한)은 전날 밤 서울 강서구의 한 병원에서 입원 치료를 받던 중 세상을 떠났다.
고인은 지난해 3월 허리디스크 수술을 받은 뒤 거동이 불편해져 2011년부터 14년간 진행해 온 KBS 1TV 교양 프로그램 ‘한국인의 밥상’에서 하차했다. 이후 재활에 전념했지만 최근 건강 상태가 악화한 것으로 전해졌다.
고인의 마지막 길을 지킨 아내 김민자와 가족들은 깊은 슬픔에 잠겼다. 빈소는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될 예정이며, 유족으로는 배우 김민자와 아들 동녘 씨, 딸 동비 씨가 있다.
1939년 인천 제물포구에서 태어난 최불암은 서울 중앙고와 서라벌예대, 한양대 연극영화과를 졸업했다. 연출가를 꿈꿨던 그는 1959년 극단 ‘실험극회’의 연극 ‘햄릿’으로 무대에 처음 섰다. 1965년 국립극단 단원으로 활동하며 본격적인 연기 경력을 쌓았고, 1967년 서울중앙방송(현 KBS) 특채 탤런트로 선발되면서 TV 드라마에 진출했다.
당시 20대였던 그는 드라마 ‘수양대군’에서 노년의 김종서 역을 맡아 일찍부터 깊이 있는 연기를 선보였다. 이후 다양한 작품에서 나이와 배역의 경계를 넘나들며 자신만의 연기 세계를 구축했다.
최불암을 국민 배우의 반열에 올린 대표작은 단연 MBC 드라마 ‘수사반장’과 ‘전원일기’다.
1971년부터 1984년까지, 이어 1985년부터 1989년까지 방송된 ‘수사반장’에서 그는 박영한 반장 역을 맡아 원칙과 인간미를 겸비한 형사의 모습을 그렸다. 오랜 기간 시청자들의 사랑을 받은 이 작품은 한국형 수사 드라마의 대표작으로 꼽히며, 최불암에게 ‘영원한 수사반장’이라는 수식어를 안겼다.
1980년부터 2002년까지 22년간 방영된 ‘전원일기’에서는 양촌리 김 회장으로 출연했다. 마을과 가족을 보듬는 따뜻한 어른의 모습을 자연스럽게 표현하며 한국 사회가 기억하는 아버지의 전형을 만들어냈다.
MBC 드라마 ‘그대 그리고 나’에서는 캡틴 박 역으로 시청자들과 만났으며, ‘제1공화국’과 ‘제2공화국’에서는 이승만 전 대통령을 연기했다. 이 밖에도 ‘여명의 눈동자’, ‘미망’, ‘영웅시대’, ‘궁’, ‘식객’ 등 여러 작품에서 묵직한 존재감을 드러냈다.
고인은 작품의 비중을 가리지 않고 연기의 완성도를 추구한 배우로도 알려져 있다. 젊은 시절부터 노년의 인물을 자주 맡았으며, 서른 살 무렵 출연한 MBC 드라마 ‘역풍’에서도 노인 역을 소화했다. 배역의 크기보다 작품과 인물에 대한 이해를 중시했던 그의 태도는 오랜 연기 활동을 지탱하는 바탕이 됐다.
최불암의 활동 무대는 TV에만 머물지 않았다. 영화 ‘빛과 그림자’를 시작으로 ‘여마적’, ‘만종’, ‘파계’, ‘영자의 전성시대’, ‘왕십리’, ‘진짜진짜 좋아해’, ‘바람 불어 좋은 날’, ‘기쁜 우리 젊은 날’, ‘까불지마’, ‘잠복근무’ 등 다수의 작품에 출연하며 스크린에서도 활약했다.
연극 무대와의 인연도 이어갔다. 2018년에는 연극 ‘바람 불어 별이 흔들릴 때’를 통해 약 25년 만에 무대에 복귀했다. 같은 해 OCN 드라마 ‘라이프 온 마스’에 출연했고, 2024년에는 ‘수사반장’의 과거 이야기를 다룬 MBC 드라마 ‘수사반장 1958’에 특별 출연하며 오랜 세월 이어진 작품과의 인연을 보여줬다.
올해 5월에는 그의 연기 인생을 돌아보는 MBC 다큐멘터리 2부작 ‘파하, 최불암입니다’가 공개돼 관심을 모았다. 고인은 재활 치료에 집중하려는 가족의 뜻에 따라 직접 출연하지 않은 것으로 전해졌다.
최불암이 오랫동안 사랑받은 이유는 탄탄한 연기력뿐 아니라 소탈하고 인간적인 이미지에도 있었다.
그는 고개를 뒤로 젖히며 ‘파하~’ 하고 웃는 특유의 웃음소리로도 유명했다. 꾸밈없는 표정과 친근한 말투는 작품 속 인물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었고, 시청자들에게 편안한 인상을 남겼다.
1990년대에는 그의 이름을 딴 유머 콘텐츠인 ‘최불암 시리즈’가 큰 인기를 얻었다. 방송인과 동료 배우들이 그의 웃음소리를 흉내 내는 모습도 자주 볼 수 있었다. 드라마 속 캐릭터를 넘어 대중문화의 친숙한 상징으로 자리 잡은 셈이다.
특히 ‘전원일기’에서 김혜자와 보여준 호흡은 오랫동안 회자됐다. 두 사람은 1969년부터 1970년까지 방송된 ‘개구리 남편’을 비롯해 여러 작품에서 함께 연기했고, ‘궁’에서도 호흡을 맞췄다. 무엇보다 ‘전원일기’에서 22년간 부부로 출연하며 실제 부부로 오해받을 정도로 자연스러운 연기를 선보였다.
최불암은 드라마와 영화뿐 아니라 시사·교양 프로그램 진행자로도 시청자들과 만났다.
1999년부터 2008년까지 KBS ‘좋은나라 운동본부’를 진행했으며, 2011년부터 지난해까지는 ‘한국인의 밥상’을 이끌었다. 전국 곳곳을 찾아 음식에 담긴 지역의 역사와 사람들의 삶을 소개하며 프로그램의 상징적인 얼굴로 활약했다.
정치에 참여했던 이력도 있다. 고인은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의 권유로 통일국민당에 합류해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비례대표로 당선됐다. 1996년 제15대 총선에서는 신한국당 후보로 서울 영등포구을 지역구에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이후 ‘전원일기’로 돌아와 본업인 연기 활동을 이어갔다.
정주영 명예회장과의 인연은 정치 활동에 그치지 않았다. 최불암은 드라마 ‘야망의 25시’에서 청년 정주영을 연기했고, ‘영웅시대’에서는 정 명예회장의 젊은 시절을 모델로 한 천태산 역을 맡기도 했다.
최불암은 배우 김민자와 1970년 결혼해 오랜 세월 부부의 연을 이어왔다. 두 사람은 약 4년간 교제한 끝에 결혼했으며, 슬하에 1남 1녀를 뒀다.
최불암은 KBS 드라마 ‘정동마님’에 출연한 김민자를 보고 호감을 느낀 것으로 알려졌다. 이후 같은 방송사에서 활동하며 인연을 이어갔고, 연극 ‘환절기’ 등 무대에서도 함께했다.
두 사람은 연예계 대표적인 원로 배우 부부로 꼽혀왔다. 최불암은 배우로서 오랜 세월 활동하는 동안 가정에서도 아내와 함께 삶의 동반자로 지냈다.
최불암은 생전 연기력과 사회공헌 활동을 두루 인정받았다.
백상예술대상 TV 부문 남자최우수연기상을 1974년과 1978년 수상했으며, 연극 부문 남자최우수연기상도 1969년과 1971년 받았다. 1978년 대종상영화제 남우조연상에 이어 1979년에는 남우주연상을 수상했다. 1998년 국민훈장 목련장, 2014년 은관문화훈장도 받았다.
‘수사반장’에서 형사 역할을 맡아 경찰의 긍정적인 이미지를 알린 공로로 1972년 명예 경찰에 위촉됐으며, 2024년에는 민간인으로서는 처음으로 명예 국가수사본부장에 위촉됐다.
어린이와 청소년을 위한 나눔 활동도 오랫동안 이어갔다. 미아 찾기와 희소병·난치병 어린이 돕기 특별 생방송 등에 참여했으며, 초록우산어린이재단 전국후원회장과 사단법인 제로캠프 이사장 등을 맡아 사회공헌 활동에 힘썼다.
고인의 장례는 초록우산 어린이재단장으로 치러질 예정이다. 평생 어린이와 청소년의 권익과 행복한 미래를 위해 헌신해 온 뜻을 기리기 위해 장례위원회가 구성되며, 황영기 초록우산 회장이 장례위원장을 맡는다. 이수성·이낙연 전 국무총리 등도 장례위원으로 참여할 예정이다.
고 최불암은 67년간 수많은 작품을 통해 강직한 형사와 따뜻한 아버지, 이웃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어른의 모습을 그려냈다. 그의 연기는 시대와 세대를 넘어 시청자들의 기억 속에 남게 됐다.
‘영원한 수사반장’이자 ‘국민 아버지’로 불렸던 배우 최불암. 특유의 웃음과 함께 안방극장을 지켜온 그의 빈자리는 오랫동안 대중의 마음에 남을 것으로 보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