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한국현대사 1959–2020』
유시민 지음 | 돌베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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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보통 과거형으로 쓰인다. 이미 끝난 이야기, 박제된 사실, 시험 문제 속 연표로 존재한다. 그러나 유시민의 『나의 한국현대사 1959–2020』은 단호히 그 관행을 거부한다. 이 책은 “이미 지나간 역사”가 아니라, 아직 끝나지 않은 “현재사(proximate history)”다. 저자는 역사를 설명하기 위해 과거로 돌아가지 않는다. 오히려 현재를 설명하기 위해 과거를 호출한다. 그래서 이 책은 연대기가 아니라 질문서에 가깝다. 우리는 어디에서 출발했고, 무엇을 거쳐, 지금 어디에 와 있는가.
이 책의 출발점은 1959년이다. 저자의 출생 연도이자, 대한민국이 절대빈곤과 권위주의에 놓여 있던 시절이다. 돼지띠 해의 가난한 독재국가에서 2020년의 풍요로운 민주국가까지, 단 60여 년. 인류사적으로도 드문 속도의 변화다. 유시민은 이 극적인 변화를 “그라운드 제로에서의 질주”라고 표현한다. 아무것도 없는 출발선에서 시작해, 산업화·도시화·민주화를 동시에 겪어낸 사회. 그러나 그는 성취에 도취하지 않는다. 욕망의 변화, 불평등의 구조, 민주주의의 피로라는 그늘 또한 집요하게 들춰낸다.
4·19와 5·16을 다루는 장에서 저자의 시선은 더욱 냉정해진다. 흔히 선과 악, 민주와 독재의 이분법으로 설명되던 두 사건을 그는 분단체제라는 구조 속에서 재배치한다. 4·19는 민주세력이 역사 전면에 등장한 순간이었지만, 그 에너지는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5·16 군사정변은 민주주의를 유예시킨 폭력이었으나, 동시에 산업화 세력이 주도권을 장악한 분기점이었다. 반민특위의 좌절, 친일 청산의 실패는 이후 한국 정치의 고질적 균열로 이어진다. 이 책은 누가 옳았는지를 판결하기보다, 왜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는지를 묻는다.
3장은 한국 현대사의 가장 역설적인 장면을 펼쳐 보인다. 절대빈곤에서 고도성장으로, 그리고 다시 양극화로. ‘한강의 기적’은 신화가 아니라 정책과 노동, 국제질서가 맞물린 결과였다. 국가 주도의 산업화는 압축성장을 가능케 했지만, 1997년 IMF 외환위기는 그 모델의 취약성을 한순간에 드러냈다. 유시민은 통계와 자료를 통해 한국 사회가 ‘추격자’에서 ‘선도국가’로 이동했음을 보여주면서도, 그 이동이 모든 시민에게 동일한 의미였는지는 질문한다. 성장의 평균은 올랐지만, 삶의 체감은 갈라졌다.
한국형 민주화의 경로를 다룬 4장은 이 책의 핵심 중 하나다. 군사정권의 시간표—5·16, 유신, 10·26, 6월 항쟁—는 단순한 권력 변동사가 아니다. 그것은 도시화된 시민들이 어떻게 정치의 주체로 등장했는지를 보여주는 기록이다. 전국적 도시봉기라는 표현은 과장이 아니다. 공장과 대학, 거리와 광장에서 시민은 더 이상 통치의 대상이 아니라 결정의 주체가 되었다. 그러나 1987년 체제 역시 완결이 아니었다. 절차적 민주주의의 성취 뒤에 남은 사회경제적 불평등, 제도 정치의 한계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5장은 한국 사회의 색이 어떻게 변해왔는지를 보여준다. 단색의 병영국가에서 무지개색 광장으로. 한강 개발, 가족계획, 금서와 금지곡의 시대를 지나, 복지국가와 권리 담론이 등장한다. 장애인, 여성, 성소수자 운동은 민주주의가 선거를 넘어 삶의 영역으로 확장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지표다. 유시민은 이를 ‘정상국가로의 이행’이라 부르지 않는다. 대신, 갈등이 가시화되는 사회, 차이가 목소리를 갖는 사회로 설명한다. 성숙의 징후이자 동시에 새로운 숙제다.
마지막 장에서 다뤄지는 남북관계는 이 책 전체를 관통하는 긴장이다. 75년 이어진 적대적 공존, 냉전의 잔재, ‘빨갱이’라는 정치적 언어, 간첩 조작과 공포의 통치. 북핵 위기와 정전 체제의 고착 속에서도 평화와 공존을 모색해온 시도들은 성공과 실패를 반복해왔다. 저자는 통일을 낭만으로 말하지 않는다. 다만 적대를 관리하고, 전쟁을 피하며, 공존의 공간을 넓히는 것이 현실적 과제임을 강조한다.
에필로그에서 다루는 2014년 이후의 사건들은 이 책이 왜 ‘현재사’인지를 분명히 한다. 세월호, 메르스, 박근혜 탄핵과 촛불혁명, 미투와 장애인 이동권 투쟁, 남북미 정상회담, K컬처의 확산, 코로나19 대응까지. 이 사건들은 하나의 질문으로 수렴된다. 대한민국은 위기 앞에서 어떤 선택을 해왔는가. 그리고 그 선택은 누구의 힘이었는가.
『나의 한국현대사』는 독자에게 정답을 주지 않는다. 대신 책임을 요구한다. 특히 젊은 세대에게 이 책은 “너희는 이 역사와 무관하지 않다”고 말한다. 민주주의와 번영은 자연 상태가 아니라, 선택과 참여의 결과였음을 상기시킨다. 갈등과 분열의 역사는 끝나지 않았지만, 공감과 연대의 가능성 역시 아직 닫히지 않았다.
과거를 외면한 사회는 미래를 설계할 수 없다. 유시민의 이 책은 기억을 소환하는 동시에, 질문을 남긴다. 우리가 지금 누리고 있는 이 ‘현재’는 어떤 선택의 결과인가. 그리고 다음 장은 누가, 어떻게 써 내려갈 것인가. 역사는 여전히 진행 중이다. 그리고 그 서술자는, 결국 우리 자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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